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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2000년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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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민주당 (2000년 대한민국)은 2000년 1월 새정치국민회의를 확대 개편하여 창당되었으며, 같은 해 총선에서 제2당이 되었다.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 후보를 당선시켰으나, 노무현 대통령의 탈당과 당내 분열로 인해 야당으로 전락했다. 2004년에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을 주도했으나 총선에서 참패하며 원내교섭단체 지위를 상실했고, 2005년 당명을 민주당으로 변경했다. 2007년에는 열린우리당과 통합하여 통합민주당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여러 차례 전당대회를 통해 지도부를 선출했으며, 2000년 총선과 2002년 대선에서 주요한 선거 결과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당내 분열과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 등으로 인해 비판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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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2000년 대한민국)
지도
기본 정보
정당 명칭민주당
로마자 표기Minjudang
한자 표기民主黨
이전 정당 명칭새천년민주당
이전 정당 로마자 표기Saecheonnyeon Minjudang
이전 정당 한자 표기새千年民主黨
약칭MDP
로고
창당일2000년 1월 20일
해산일2007년 6월 27일
해산 사유중도통합민주당으로 통합
본부 위치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25-4
색상청록색
터키옥색
주요 인물
초대 총재김대중 (2002년까지)
마지막 대표박상천
최고위원유종필
김영환
조순형
한화갑
한광옥
정치 성향
이념자유주의
중도개혁주의
햇볕정책
사회자유주의
정치적 위치중도주의
중도좌파
관련 정보
관련 정당새정치국민회의, 자유민주연합 (2000-2001년 연합)
합병 대상 정당중도통합민주당
웹사이트민주당 (폐쇄)
기타
전신새정치국민회의, 신국민당
분당 후열린우리당
후신민주당 (2007)

2. 역사

== 역사 ==

2000년 1월 20일, 새정치국민회의를 확대 개편하여 새천년민주당이 창당되었다. 같은 해 치러진 총선에서 115석을 얻어 제2당이 되었지만,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경선 제도를 도입하여 노무현 후보를 선출했다. 같은 해 5월, 김대중 대통령은 각종 게이트 의혹과 아들들의 비리 연루로 당을 탈당했고, 12월에는 노무현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9월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했고, 당은 야당으로 전락했다. 같은 해 11월, 개혁 성향의 당원들이 탈당하여 열린우리당을 창당하면서 당세는 크게 약화되었다. 2004년에는 한나라당과 자유민주연합과 함께 노무현 대통령 탄핵을 주도했으나, 국민적 지지를 잃고 17대 총선에서 9석만을 얻는 참패를 겪으며 원내교섭단체 지위를 상실했다. 2005년 5월에는 당명을 민주당으로 변경했다. 2000년 총선에서 당은 115석을 얻어 제2당이 되었다. 2004년 3월 국회에서 불법 선거운동 및 직무유기 혐의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한나라당의 지지 속에 가결되면서 다수당 지위를 상실했고, 2004년 총선에서 53석을 잃고 9석만을 얻었다. 노무현은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이 기각되어 대통령직을 임기 종료까지 수행했다. 2007년 6월, 새천년민주당의 상당수는 열린우리당에 합류했고, 새한국당 계열은 중도개혁통합신당과 합쳐 새로운 민주당을 구성했다.

2. 1. 창당 이전

1987년 5월 1일, 통일민주당이 창당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12일, 김대중을 중심으로 한 탈당파들이 평화민주당을 창당하며 정치적 분열이 발생했다. 1991년 4월 15일, 평화민주당은 이우정, 신계륜, 장영달 등 재야 운동가들을 영입하여 신민주연합당으로 당명을 변경했다. 같은 해 9월 16일, 3당 합당으로 거대 여당이 탄생했고, 이에 반대한 통일민주당 잔류파인 꼬마민주당과 신민주연합당이 합쳐 민주당(통합민주당)이 창당되었다. 1995년 9월 5일에는 김대중의 주도로 민주당 내 상당수 인사들이 탈당하여 새정치국민회의가 창당되었고, 김대중은 1997년 12월 18일 대통령에 당선되며 새정치국민회의는 집권 여당이 되었다.

2. 2. 창당 이후

2000년 1월 20일, 새정치국민회의를 확대 개편하여 '''새천년민주당'''이 창당되었다. 2000년 총선에서 115석을 얻어 제2당이 되었으나, 2002년 2월 제16대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국민경선 제도를 도입하여 노무현 후보를 선출하였다. 같은 해 5월 6일, 김대중 대통령은 각종 게이트 의혹과 아들들의 비리 연루로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였다. 12월 19일, 노무현은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9월 29일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였고, 당은 야당으로 전락하였다. 같은 해 11월 11일, 개혁파 성향의 당원들이 탈당하여 열린우리당을 창당하면서 당세가 크게 약화되었다. 2004년에는 한나라당과 자유민주연합과 함께 노무현 대통령 탄핵을 주도하였으나, 국민적 지지를 잃고 17대 총선에서 9석만을 얻어 원내교섭단체 지위를 상실하는 참패를 겪었다. 2005년 5월 6일, 당명을 '''민주당'''으로 변경하였다.

2007년 2월, 김한길을 비롯한 열린우리당 의원 23명이 탈당하여 중도개혁통합신당추진모임을 결성하였고, 4월 3일 민주당 대표로 박상천이 선출되었다. 같은 달 재보궐선거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차남인 김홍업이 민주당 후보로 당선되었다. 4월 30일, 신국환 의원이 국민중심당을 탈당하여 중도개혁통합신당추진모임에 합류하였고, 5월 7일 김한길을 대표로 하는 중도개혁통합신당이 창당되었다. 5월 17일, 이인제 의원이 국민중심당을 탈당하고 민주당에 복당하였다. 마침내 6월 27일, 민주당과 중도개혁통합신당이 합당하여 34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통합민주당'''이 창당되었다.

3. 2002년 대통령 선거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은 노무현 후보를 중심으로 치열한 선거전을 치렀다. 5월, 김대중 대통령 아들의 비리 의혹이 불거지면서 민주당과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은 하락했고, 이에 노무현 후보는 6·13 지방선거에서 영남 지역 광역단체장을 한 명도 당선시키지 못하면 후보직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했다.[19] 결과적으로 새천년민주당은 호남과 제주 지역만 승리하는 참패를 기록했지만,[20] 당무회의의 만장일치 재신임으로 후보직을 유지했다.[20] 하지만 중도 개혁 포럼은 이에 반발하며 노무현 후보와 지도부의 사퇴를 요구했다.[21]

정몽준의 대통령 출마 선언은 노무현 후보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노무현 흔들기'가 본격화되며 후보 단일화는 물론 후보 교체론까지 제기되었고,[22] 노무현 후보의 낙마를 원하는 의원들은 탈당하여 후보 단일화 추진 협의회(후단협)를 결성, 정몽준 후보를 지지하며 공개적으로 노무현 후보와의 단일화를 거부했다.[23] 심지어 금품 요구 사건까지 발생하는 등 당내 분열은 극에 달했다.[24] 후단협 해체 후 일부 의원들은 한나라당으로, 일부는 민주당으로 복당했다.[25]

이러한 혼란 속에서 김민석 의원의 국민통합21 입당은 예상과 달리 노무현 후보에게 반전의 기회를 제공했고,[16] 지지율 회복과 후원금 증가로 이어졌다.[16]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후보의 단일화는 국민경선, 여론조사, 협상 담판 등 세 가지 방안을 놓고 진행되었다.[26][27] 정몽준 후보의 협상 담판 제안과 노무현 후보의 국민경선안 제시 후, 노무현 후보는 자신에게 불리한 여론조사를 통한 단일화를 제안하고, '무효화 조항' 수용 등 적극적인 양보를 통해 단일화에 대한 의지를 보였다.[28][29] 결국, 두 곳의 여론조사에서 노무현 후보가 승리했고,[30] 선거 전날 정몽준 후보의 지지 철회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며 새천년민주당은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다.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 후보는 12,014,277표(48.91%)를 획득하여 당선되었다.

선거연월일후보자득표수득표율당락
제16대2002년 12월 19일노무현12,014,27748.91%당선


3. 1. 국민경선

2002년 3월 9일 제주를 시작으로 전국 16개 시도에서 당원(50%)과 국민(50%)의 직접 투표로 새천년민주당 대선 후보 국민경선이 진행되었다. 노무현을 비롯해 김근태, 김중권, 유종근, 이인제, 정동영, 한화갑 등이 후보로 출마했다. 경선 시작 전 이인제는 부동의 1위였으나, 노무현은 10% 미만의 지지율을 기록하는 군소 후보였다. 그러나 경선 국면에서 노무현은 “영남 후보론”과 이인제 후보를 겨냥한 “정체성 시비”를 제기하며 20%대 지지율까지 상승했다.[16]

제주 경선에서는 한화갑이 1위, 노무현은 3위를 기록했다. 울산 경선에서는 노무현이 1위를 차지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3월 13일 문화일보와 SBS의 공동 여론조사 결과, 노무현은 이회창을 앞서는 41.7%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대선 구도 형성 이후 처음으로 여당 후보가 이회창을 앞선 결과였다.[17]

3월 16일 광주 경선은 최대 승부처였다.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적 기반이자 새천년민주당의 근거지였던 광주에서 노무현은 승리하며 이회창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후보라는 여론에 힘입어 지지율이 급상승, ‘노풍’을 일으켰다.[18]

광주 경선 직후 이인제의 지역 기반인 대전·충청권에서 노무현이 일격을 당했으나, 대구 경선에서 종합 1위를 확정지었다. 이후 강원도, 전남, 전북, 경남, 대구 등 거의 전 지역을 석권하며 4월 26일 서울 경선에서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공식 선출되었다. 경선 종료 후 노무현의 지지율은 당시 역대 최고치인 60%를 기록했다.[16]

3. 2. 지방선거와 민주당 후보 재신임

5월, 김대중 대통령의 아들인 김홍업과 김홍걸의 비리 의혹이 불거지면서 민주당 지지율이 하락했고,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도 함께 떨어지기 시작했다. [19] 이에 노무현 후보는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영남 지역 광역단체장을 한 명도 당선시키지 못하면 후보직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했다. [19]

하지만 6·13 지방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은 호남과 제주 지역 광역단체장만 당선시키는 참패를 기록했다. [20] 노무현 후보는 선거 전 약속대로 후보직 재신임 여부를 묻는 투표를 진행했고, 민주당 당무회의는 만장일치로 그를 재신임했다. [20] 그러나 당내 최대 계파였던 중도 개혁 포럼은 이 결과에 불복하며 노무현 후보와 지도부의 즉각 사퇴를 주장했다. [21]

3. 3. 정몽준 출마와 민주당 내분 사태

2002년 FIFA 월드컵 열기를 타고 정몽준이 대통령 출마를 선언하며 거센 돌풍을 일으키자, 노무현 후보는 지지율 급락과 당내 배척을 겪게 되었다. '노무현 흔들기'는 더욱 노골적으로 진행되었고, '후보 단일화론'은 물론 '후보 교체론'까지 제기되었다.

10월에는 노무현 후보의 낙마를 바라는 의원들이 탈당하여 후보 단일화 추진 협의회(후단협)를 결성하고 후보 단일화를 주장했다. 이들은 노무현 후보와의 단일화를 거부하고 정몽준 후보 지지 의사를 숨기지 않았다.[22] 11월 19일 후단협은 정몽준 후보에 대한 공개 지지를 선언했으며,[23] 심지어 후단협 소속 의원이 정몽준 후보 측에 금품을 요구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24] 후단협 해체 후 일부 의원들은 한나라당에 입당했고, 12명은 민주당에 복당했다.[25]

이러한 혼란 속에서 김민석 의원의 국민통합21 입당은 노무현 후보에게 반전의 기회를 제공했다. 초기에는 악재로 작용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은 20%대로 회복되었고 후원금도 크게 증가했다.[16]

3. 4.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후보의 단일화

2002년 대선을 앞두고,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후보의 단일화는 국민 경선, 여론 조사, 협상 담판 등 세 가지 방안을 놓고 진행되었다. 정몽준 후보는 11월 1일에 협상 담판을 제안했고, 노무현 후보는 11월 3일에 국민 참여 50%, 당원 참여 50%의 국민 경선안을 제시했다. 여론 조사는 정몽준 후보에게 유리한 방안으로 여겨졌다.[26][27]

11월 11일, 노무현 후보는 자신에게 불리한 여론 조사를 통한 단일화를 제안했으며, 재협상 과정에서 '무효화 조항'을 수용하는 등 적극적인 양보를 보였다. 민주당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설문 내용 변경까지 수용하며 단일화에 대한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이러한 노무현 후보의 적극적인 자세는 그의 지지율 상승으로 이어졌다.[28][29]

텔레비전 토론 이후 11월 24일 실시된 두 곳의 여론조사에서 노무현 후보는 극적으로 승리했다. 리서치 앤드 리서치 조사에서는 46.8%를 얻어 정몽준 후보(42.2%)를 앞섰고, 월드 리서치 조사에서는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이 유효화 조건(31.1%)에 미달(28.7%)하여 무효 처리되었지만, 노무현 후보는 38.8%로 정몽준 후보(37%)를 앞섰다.[30]

선거 전날 정몽준 후보의 지지 철회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후보는 당선되어 새천년민주당의 정권 재창출을 이끌었다.

4. 논란과 비판

논란과 비판

새천년민주당은 활동 과정에서 여러 논란과 비판에 직면했다. 특히 2003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는 당의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힌 결정적 사건이었다. 당시 여당이었던 새천년민주당은 노무현 대통령의 탈당 이후 야당으로 전락하여, 한나라당, 자유민주연합과 함께 탄핵을 추진했다. 이는 국민적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17대 총선 참패로 이어져 군소 정당으로 전락하는 결과를 낳았다. 탄핵 추진의 부당성과 국민 여론과의 심각한 괴리는 당시 여당의 정치적 책임을 명확히 보여주는 사례이며, 국민들의 분노와 좌절을 불러일으킨 이 사건은 민주당 역사의 큰 오점으로 남아있다. 이후 당의 재건은 이러한 과거의 실책을 극복하는 과정이었다.

4. 1. 인위적인 정계 개편

새천년민주당(현 더불어민주당의 전신)은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의 당선으로 여당이 되었으나, 이후 총선에서 한나라당(현 국민의힘의 전신)에 패배하며 불안정한 정국을 맞게 되었다. 특히 자유민주연합과의 공동여당 체제는 의석수 부족과 내부 갈등으로 위기를 맞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지시 아래, 1998년 12월, 새천년민주당 소속 유성구 국회의원 송석찬이 주도한 ‘의원 꿔주기’ 사건이 발생했다. 송석찬을 비롯한 장재식, 송영진, 배기선 의원 등이 자유민주연합으로 당적을 바꾼 것이다.

이 사건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민의를 배신하고 정당정치의 근간을 훼손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자유민주연합 내에서도 반대 의견이 제기되었고, 이에 반대한 강창희 의원은 제명당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당시 송석찬 의원의 “연어의 심정으로 민주당을 떠납니다”라는 탈당 선언은 큰 화제가 되었다. 결국, 이 사건은 여야 관계 악화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자민련의 권력 남용 논란과 맞물려 공동여당 체제는 결국 해체되었다. 이러한 정계 개편 과정은 당시 여론의 엄중한 비판을 받았으며, 민주당의 정치적 신뢰도에 큰 타격을 입혔다.

4. 2. 노무현 대통령 탄핵

2003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는 민주당에게 큰 타격을 안겨주었다. 당시 집권 여당이었던 민주당은 노무현 대통령의 탈당 이후 야당으로 전락했고, 한나라당, 자유민주연합과 함께 탄핵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행보는 국민들의 거센 반발에 직면했고, 결국 17대 총선에서 참패하여 군소 정당으로 전락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 사건은 민주당의 이미지에 큰 손상을 입혔으며, 이후 당의 재건 과정에서 극복해야 할 큰 과제로 남았다. 탄핵 추진 과정의 부당성과 국민 여론과의 괴리를 강조하며, 당시 여당의 정치적 책임과 그 결과를 명확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 국민들의 분노와 좌절을 야기한 탄핵 시도는 민주당의 역사에 큰 오점으로 남아있다.

5. 역대 지도부

새천년민주당의 지도부는 대표최고위원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2000년 1월부터 2005년 2월까지, 서영훈, 김중권, 한광옥, 한화갑, 정대철, 박상천, 조순형 등이 차례로 대표최고위원직을 역임했다. 서영훈은 2000년 초반 두 차례에 걸쳐 대표최고위원을 지냈다. 한화갑은 2002년 4월부터 2003년 2월까지, 그리고 2004년 4월부터 2005년 2월까지 두 차례 대표최고위원직을 수행했는데, 첫 번째 임기는 참여정부 출범과 함께 사퇴했고, 두 번째 임기는 제17대 총선 참패 이후 비상대책위원장을 거쳐 대표로 선출되었다. 정대철은 한화갑의 사퇴 이후 대표최고위원을 이어받았으나, 열린우리당 합류를 위해 사퇴했다. 조순형은 제17대 총선 참패의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각 대표의 임기와 주요 사건은 아래 표에 자세히 정리되어 있다.

대수역대 대표직함임기비고
1서영훈대표최고위원2000년 1월 20일 ~ 2000년 8월 30일총재가 지명
2서영훈대표최고위원2000년 8월 30일 ~ 2000년 12월 20일총재가 지명
3김중권대표최고위원2000년 12월 20일 ~ 2001년 9월 9일총재가 지명
4한광옥대표최고위원2001년 9월 10일 ~ 2002년 4월 27일총재가 지명
5한화갑대표최고위원2002년 4월 27일 ~ 2003년 2월 23일참여정부 출범과 함께 사퇴
6정대철대표최고위원2003년 2월 23일 ~ 2003년 9월 21일한화갑 사퇴로 승계, 열린우리당 합류 위해 사퇴
7박상천대표최고위원2003년 9월 22일 ~ 2003년 11월 28일정대철 사퇴로 승계
8조순형대표2003년 11월 28일 ~ 2004년 4월 16일대한민국 제17대 총선 참패로 사퇴
(임시)한화갑비상대책위원장2004년 4월 19일 ~ 2004년 4월 26일대한민국 제17대 총선 참패로 비대위 구성
9한화갑대표2004년 4월 26일 ~ 2005년 2월 3일대표로 추대


5. 1. 역대 총재

대수역대 대표직함임기비고
1김대중총재2000년 1월 20일 ~ 2001년 11월 13일10·25 재보선 전패로 사퇴
(임시)한광옥총재 권한대행2001년 11월 13일 ~ 2002년 2월 3일총재직 폐지


5. 2. 역대 대표

대수역대 대표직함임기비고
1서영훈대표최고위원2000년 1월 20일 ~ 2000년 8월 30일총재가 지명
2서영훈대표최고위원2000년 8월 30일 ~ 2000년 12월 20일총재가 지명
3김중권대표최고위원2000년 12월 20일 ~ 2001년 9월 9일총재가 지명
4한광옥대표최고위원2001년 9월 10일 ~ 2002년 4월 27일총재가 지명
5한화갑대표최고위원2002년 4월 27일 ~ 2003년 2월 23일참여정부 출범과 함께 사퇴
6정대철대표최고위원2003년 2월 23일 ~ 2003년 9월 21일한화갑 사퇴로 승계, 열린우리당 합류 위해 사퇴
7박상천대표최고위원2003년 9월 22일 ~ 2003년 11월 28일정대철 사퇴로 승계
8조순형대표2003년 11월 28일 ~ 2004년 4월 16일대한민국 제17대 총선 참패로 사퇴
(임시)한화갑비상대책위원장2004년 4월 19일 ~ 2004년 4월 26일대한민국 제17대 총선 참패로 비대위 구성
9한화갑대표2004년 4월 26일 ~ 2005년 2월 3일대표로 추대


6. 주요 선거 결과

== 주요 선거 결과 ==

2000년대 초반, 새천년민주당은 대한민국 정치의 주요 세력으로 자리매김하며 여러 선거에서 중요한 결과를 만들어냈다. 특히 2000년 제16대 총선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며 여당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했지만, 2004년 제17대 총선에서는 의석수가 크게 감소하며 야당으로 전락했다. 이러한 변화는 당시 정치 환경과 국민 여론의 변화를 반영하는 결과로 해석된다. 다음은 주요 선거 결과를 정리한 표이다.

선거지도자지역구 득표수지역구 득표율 (%)지역구 의석 수지역구 의석 수 변화비례대표 득표수비례대표 득표율 (%)비례대표 의석 수비례대표 의석 수 변화총 의석 수총 의석 수 변화순위지위
2000년김대중6,780,62535.8796신규19신규115신규2위여당
2004년조순형1,698,3687.965-911,510,1787.094-159-1064위야당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는 김대중 대통령의 리더십 아래 지역구에서 96석, 비례대표에서 19석을 확보하며 총 115석을 얻었다. 하지만 2004년 제17대 총선에서는 조순형 대표 체제 하에 지역구 5석, 비례대표 4석으로 총 9석에 그치며 의석수가 크게 줄었다. 이는 당시 정부에 대한 비판 여론과 다른 정당의 약진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분석된다. 지방선거에서도 새천년민주당과 이후 민주당은 2002년과 2006년 선거에서 광역 및 기초단체장, 의회 의석 수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으나, 2004년 총선 결과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지형 변화에 영향을 받았다. 자세한 내용은 하위 항목을 참고.

6. 1. 대통령 선거

2002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의 노무현 후보는 12,014,277표(48.91%)를 얻어 당선되었다.

6. 2. 국회의원 선거



선거지도자지역구 득표수지역구 득표율 (%)지역구 의석 수지역구 의석 수 변화비례대표 득표수비례대표 득표율 (%)비례대표 의석 수비례대표 의석 수 변화총 의석 수총 의석 수 변화순위지위
2000년김대중6,780,62535.8796신규19신규115신규2위여당
2004년조순형1,698,3687.965-911,510,1787.094-159-1064위야당



선거날짜총 의석 수지역구 의석 수비례대표 의석 수비례대표 득표율 (%)
제16대2000년 4월 13일115961935.9%
제17대2004년 4월 15일9547.1%



제16대는 지역구 득표율(1인 1표제이므로)

6. 3. 지방선거

2002년, 2006년 지방선거 민주당 성적
선거광역자치단체장기초자치단체장광역의회 의석수기초의회 의석수
2002년4석 (새천년민주당)44석 (새천년민주당)143석 (새천년민주당)682석 (새천년민주당)
2006년2석 (대한민국 민주당 (2005년))20석 (대한민국 민주당 (2005년))80석 (대한민국 민주당 (2005년))733석 (대한민국 민주당 (2005년))






2002년 지방선거 민주당 광역의회 의석수 상세 내역
선거년월일광역단체장기초단체장광역의회 합계광역의회 지역구광역의회 비례구광역의회 비례구 득표율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2002년 6월 13일4석44석143석121석22석29.1%


7. 역대 전당대회

== 역대 전당대회 ==

새천년민주당은 2000년 창당 이후 여러 차례 전당대회를 통해 당 지도부를 선출했다. 주요 전당대회 결과는 다음과 같다.

} 2000년 8월 30일 개최된 제1차 전당대회에서는 1인 4표 방식으로 당 지도부를 선출했다. 한화갑 후보가 지도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이인제, 김중권, 박상천, 정동영, 김근태, 정대철 후보가 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서영훈 대표를 비롯한 몇몇 인사를 최고위원으로 지명했다. 자세한 득표 결과는 아래 표와 같다.

득표순위이름득표수득표율비고
1한화갑4,93356.6%지도위원
2이인제3,86244.3%최고위원
3김중권3,76943.3%최고위원
4박상천3,37338.7%최고위원
5정동영3,04434.9%최고위원
6김근태2,96634.1%최고위원
7정대철2,59029.7%최고위원
8김기재1,93222.2%
9김민석1,93222.2%
10안동선1,65519%
11추미애1,62718.7%
12이협90610.4%
13조순형89610.3%
14김회선7999.2%
15김태식7628.7%
총투표수8,710



}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치러진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는 이인제, 조순형, 김민석 등 여러 후보가 경쟁을 펼쳤다. 김영환 전 과학기술부 장관은 경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 2001년 11월 8일 김대중 대통령의 사퇴 이후 치러진 제2차 전당대회에서는 한화갑 후보가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정대철, 박상천, 한광옥, 이협, 추미애, 신기남, 김태랑 후보가 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자세한 득표 결과는 아래 표와 같다.

득표순위이름득표수득표율비고
1한화갑5,96155.7%대표최고위원
2정대철5,16350.3%최고위원
3박상천4,40142.9%최고위원
4한광옥4,38142.7%최고위원
5이협3,98338.8%최고위원
6추미애3,32732.4%최고위원
7신기남2,64825.8%최고위원
8김태랑2,06320.1%최고위원
9신계륜1,99219.4%
10김옥두1,69916.5%
11이해찬1,65816.1%
12박상희1,54715.1%
13김경천1,18111.5%
14이규정1,07210.4%
총투표수10,269



} 2002년 지방선거 참패 이후, 노무현 후보의 재신임이 만장일치로 의결되었다.

} 2003년 열린우리당 창당과 정대철 대표의 탈당 이후 조기 전당대회를 통해 조순형 후보가 대표로 선출되었다. 자세한 득표 결과는 아래 표와 같다.

득표순위이름득표수득표율비고
1조순형3,11962.1%대표
2추미애2,15142.8%중앙상임위원
3김경재1,19923.9%중앙상임위원
4장재식1,15022.9%중앙상임위원
5김영환88817.7%중앙상임위원
6이협68513.6%
7김영진58111.6%
8장성민2775.5%
총투표수5,025



} 2004년 4월 조순형 대표의 사퇴 이후 한화갑 전 대표가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이후 당 대표로 추대되었다.

} 2005년 2월 3일 개최된 제4차 전당대회에서는 한화갑 후보가 대표로 재선출되었다. 대의원 투표와 후원당원 우편투표를 합산한 결과, 한화갑 후보는 83.1%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자세한 득표 결과는 아래 표와 같다.

순위이름대의원후원당원총 득표(환산)비고
비율비율비율
1한화갑3,6626,39083.1%대표
82%87.3%
2김상현79992916.9%rowspan=2 |
18%12.7%



} 2007년 4월 3일 개최된 제5차 전당대회에서는 박상천 후보가 대표로 당선되었다.

7. 1. 새천년민주당 창당대회

2000년 1월 20일, 민주당 창당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서는 새정치국민회의와의 합당이 결의되었고, 김대중 대통령이 총재로 선출되었다. 김대중 총재는 서영훈 대표최고위원과 이인제 중앙선거대책위원장을 지명했으며, 이들은 인준을 받았다. 이로써 민주당은 대한민국 제16대 총선을 준비하는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7. 2. 새천년민주당 제1차 전당대회

2000년 8월 30일, 새천년민주당 제1차 전당대회가 개최되어 1인 4표 방식으로 당 지도부가 선출되었다. 한화갑 후보가 4,933표(56.6%)를 득표하여 지도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이인제(3,862표, 44.3%), 김중권(3,769표, 43.3%), 박상천(3,373표, 38.7%), 정동영(3,044표, 34.9%), 김근태(2,966표, 34.1%), 정대철(2,590표, 29.7%) 후보가 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 외 김기재, 김민석, 안동선, 추미애, 이협, 조순형, 김회선, 김태식 후보도 출마하였으나 최고위원에 당선되지는 못했다. 총 투표수는 8,710표였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김대중은 서영훈 대표, 권노갑 상임고문, 신낙균 문화관광장관, 장태완 의원, 장을병 의원을 최고위원으로 지명했고, 서영훈 대표를 대표최고위원으로 임명했다.




득표순위이름득표수득표율비고
1한화갑4,93356.6%지도위원
2이인제3,86244.3%최고위원
3김중권3,76943.3%최고위원
4박상천3,37338.7%최고위원
5정동영3,04434.9%최고위원
6김근태2,96634.1%최고위원
7정대철2,59029.7%최고위원
8김기재1,93222.2%
9김민석1,93222.2%
10안동선1,65519%
11추미애1,62718.7%
12이협90610.4%
13조순형89610.3%
14김회선7999.2%
15김태식7628.7%
총투표수8,710


7. 3. 새천년민주당 제16대 대통령 후보 선출 국민경선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새천년민주당은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기 위한 국민경선을 실시했습니다. 경선에는 다수의 후보가 참여했는데, 그 중에는 조순형(당시 성북구 을 지역구 국회의원,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을 주도), 김민석(전 국회의원, 2002년 지방선거 서울시장 후보로 이명박 후보에게 패배), 이인제(당시 논산시, 금산군, 계룡시 지역구 국회의원, 1997년 대선 후보), 신국환(당시 문경시, 예천군 지역구 국회의원, 노무현 정부 전 상공자원부 장관), 장상(전 민주당 대표, 전 이화여자대학교 총장) 등이 있었습니다. 김영환 전 국회의원이자 김대중 정부 전 과학기술부 장관은 2007년 8월 31일 대선 경선 불출마를 선언했습니다.[7]

7. 4. 새천년민주당 제2차 전당대회

2001년 11월 8일, 김대중 대통령이 10.25 재보선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새천년민주당 총재직에서 사퇴했다. 이후 당 발전과 쇄신을 위한 특별대책위원회는 총재직을 폐지하고 집단지도체제를 도입했다. 이후 실시된 새천년민주당 제2차 전당대회에서는 1인 4표 방식의 최고위원 경선이 치러졌다.

선거 결과, 한화갑 후보가 5,961표(55.7%)를 얻어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정대철(5,163표, 50.3%), 박상천(4,401표, 42.9%), 한광옥(4,381표, 42.7%), 이협(3,983표, 38.8%), 추미애(3,327표, 32.4%), 신기남(2,648표, 25.8%), 김태랑(2,063표, 20.1%) 후보가 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신계륜, 김옥두, 이해찬, 박상희, 김경천, 이규정 후보는 최고위원에 당선되지 못했다. 총 투표수는 10,269표였다. 2002년 4월 27일, 한화갑은 최고위원 경선을 통해 대표최고위원으로 공식 선출되었다.

득표순위이름득표수득표율비고
1한화갑5,96155.7%대표최고위원
2정대철5,16350.3%최고위원
3박상천4,40142.9%최고위원
4한광옥4,38142.7%최고위원
5이협3,98338.8%최고위원
6추미애3,32732.4%최고위원
7신기남2,64825.8%최고위원
8김태랑2,06320.1%최고위원
9신계륜1,99219.4%
10김옥두1,69916.5%
11이해찬1,65816.1%
12박상희1,54715.1%
13김경천1,18111.5%
14이규정1,07210.4%
총투표수10,269


7. 5. 2002년 6월 18일 새천년민주당 당무회의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참패하자, 당시 대선후보였던 노무현 후보는 영남권에서 후보를 당선시키지 못하면 재신임을 묻겠다는 공언을 했었다. 이에 따라 6월 18일 열린 민주당 당무회의에서는 만장일치로 노무현 후보의 재신임을 의결했다. 이 결정은 당시 낙담에 빠진 민주당의 분위기를 반전시키고, 노무현 후보의 리더십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이는 지방선거 패배에 대한 책임 회피라는 비판도 존재했다.

7. 6. 새천년민주당 제3차 전당대회

2003년 9월 열린우리당 창당으로 집권여당이었던 민주당이 분당되고 정대철 대표마저 탈당하자, 민주당은 조기 전당대회를 치르게 되었다. 11월 28일, 전당대회 결과 조순형 전 민주당 부총재가 대표로 선출되었다. 조순형은 3,119표를 얻어 62.1%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추미애(2,151표, 42.8%), 김경재(1,199표, 23.9%), 장재식(1,150표, 22.9%), 김영환(888표, 17.7%) 등이 중앙상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총 투표수는 5,025표였다.

득표순위이름득표수득표율비고
1조순형3,11962.1%대표
2추미애2,15142.8%중앙상임위원
3김경재1,19923.9%중앙상임위원
4장재식1,15022.9%중앙상임위원
5김영환88817.7%중앙상임위원
6이협68513.6%
7김영진58111.6%
8장성민2775.5%
총투표수5,025


7. 7. 2004년 4월 26일 새천년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2004년 4월 19일, 조순형 대표가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와 대한민국 제17대 총선 참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이에 민주당은 총선 당선자 회의를 통해 한화갑 전 대표를 위원장으로 하는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러나 4월 26일, 비상대책위원회는 당헌당규에 비대위원장직의 권한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다는 점을 들어 한화갑 위원장을 당 대표로 추대하는 결정을 내렸다.

7. 8. 새천년민주당 제4차 전당대회

2005년 2월 3일, 새천년민주당 제4차 전당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전당대회는 대의원 현장투표와 후원당원 우편투표를 8:2 비율로 적용한 경선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결과적으로 한화갑 후보가 대표로 재선출되었다. 한화갑 후보는 대의원 투표에서 82%, 후원당원 투표에서 87.3%의 득표율을 기록하여 총 83.1%의 득표율을 얻었다. 김상현 후보는 16.9%의 득표율에 그쳤다. 이 전당대회 이후 새천년민주당은 열린우리당과의 합당을 반대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순위이름대의원후원당원총 득표(환산)비고
비율비율비율
1한화갑3,6626,39083.1%대표
82%87.3%
2김상현79992916.9%rowspan=2 |
18%12.7%


7. 9. 민주당 제5차 전당대회

2007년 4월 3일, 민주당 제5차 전당대회가 개최되었다. 전당대회 결과, 박상천 후보가 2,164표(42.3%)를 얻어 대표로 당선되었다. 2위는 1,924표(37.7%)를 얻은 장상 후보였으며, 김영환(536표, 10.3%), 김경재(376표, 6.2%), 심재권(126표, 2.1%) 후보가 그 뒤를 이었다. 총 투표수는 5,118표였다. 이로써 박상천은 민주당 대표가 되었다.

8. 역대 정당 당원

분류:새천년민주당 당원

참조

[1] 서적 한국의 민주주의와 사회운동: 비판・실천담론의 복원과 재구성을 위하여 당대 1998
[2] 서적 국가 폭력, 민주주의 투쟁, 그리고 희생: 한국 민주주의 와 사회 운동 의 동학, 2 함께 읽는 책 2002
[3] 뉴스 하태경 "DJ, 빨갱이 꼬리표 떼야…보수진영 어른으로 모셔야" https://www.yna.co.k[...] 2017-08-18
[4] 뉴스 DJ 때 중도였던 민주당, 노무현·문재인 들어 좌편향 심화 https://www.joongang[...] 2018-08-20
[5] 뉴스 한국 여성 평등史의 첫 장, 김대중이 있었다 https://www.hankooki[...] 2019-08-19
[6] 뉴스 신자유주의 혁명가 김대중의 성공 그리고 한계 https://www.hankooki[...] 2009-08-24
[7] 웹사이트 Kim Yeong-hwan announced not to run https://web.archive.[...] 2007-08-31
[8] 뉴스 新千年民主党、創党大会開く http://www.chosunonl[...] 조선일보 2000-01-20
[9] 문서 形式上は、新たに結成された民主党に国民会議が合流した。
[10] 서적 東亜日報『縮刷版 2000年1月号』855頁、905頁より
[11] 문서 金大中系の議員を指す用語で、金大中の私邸が東橋洞にあることから呼ばれるようになった。
[12] 뉴스 盧大統領、民主党を電撃離党 http://www.chosunonl[...] 조선일보 2003-09-29
[13] 뉴스 民主党が「野党」宣言 http://www.chosunonl[...] 조선일보 2003-09-30
[14] 뉴스 ヨルリン・ウリ党が発足 http://www.chosunonl[...] 조선일보 2003-11-11
[15] 뉴스 「民主党」に改名 http://www.chosunonl[...] 조선일보 2005-06-08
[16] 뉴스 盧당선자 대선장정 1년7개월 https://news.v.daum.[...] 연합뉴스 2010-04-22
[17] 뉴스 선호도 노무현 41.7 이회창 40.6% https://news.v.daum.[...] 연합뉴스 2010-04-22
[18] 뉴스 [민주 ‘光州 경선’ 의미] 노무현 대안론 ‘대세’잡나 https://web.archive.[...] 국민일보 2010-04-22
[19] 뉴스 노무현 "후보 재신임 받을것" https://news.v.daum.[...] 연합뉴스 2010-04-22
[20] 뉴스 "노무현 대선 후보 사퇴 반대" 73%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10-04-22
[21] 뉴스 盧후보 사퇴론 또 불거지나 http://news.mk.co.kr[...] 매일경제 2010-04-22
[22] 뉴스 후단협 속내는 '노후보 낙마' http://www.hani.co.k[...] 한겨레 2010-04-22
[23] 뉴스 후단협의 목적은 '후보단일화'가 아니었다. https://web.archive.[...] 오마이뉴스 2010-04-22
[24] 뉴스 후단협 순수성 도마 위에 http://news.mk.co.kr[...] 매일경제 2010-04-22
[25] 뉴스 후단협 12명 민주 복당 https://news.naver.c[...] 파이낸셜 뉴스 2010-04-22
[26] 뉴스 후보단일화에서 파기까지 https://news.v.daum.[...] 연합뉴스 2010-04-22
[27] 뉴스 후보단일화 방법론과 전망 https://news.v.daum.[...] 연합뉴스 2010-04-22
[28] 뉴스 盧 단일화 `승부수" 안팎 https://news.v.daum.[...] 연합뉴스 2010-04-22
[29] 저널 승부사 노무현 마침내 해냈다 https://web.archive.[...] 2010-04-22
[30] 뉴스 피말린 접전 盧승리 결말 https://news.v.daum.[...] 연합뉴스 2010-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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